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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로마의 황제, 엘라가발루스: 혼돈과 기행의 황제 이야기


황제가 된 소년, 엘라가발루스


서기 218년,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는 불과 14세의 소년 엘라가발루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는 시리아 출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로마의 황실과 먼 친척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황제가 된 그는 제국을 경악하게 만드는 수많은 기행을 보여주며 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통치 시기는 짧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죠.

신과 같은 황제, 그리고 신성한 기행


엘라가발루스는 자신이 어린 시절 섬겼던 시리아 태양신 '엘라가발'을 황제의 신으로 로마에 도입하려 했습니다. 그는 황제가 된 이후 로마 전통의 신들 대신 엘라가발을 숭배하게 했고, 그 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기이한 의식을 벌였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황제가 종교적 광신도처럼 보이는 이 행동에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이는 그를 로마 시민들과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정치와 권력, 그리고 혼란의 나날들


엘라가발루스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통치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친척들을 고위직에 앉히고, 로마 귀족들의 전통적인 질서와 규율을 무시했습니다. 특히 황제의 신변을 지켜야 할 근위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는 결국 그의 몰락을 불러왔습니다.

기이한 취향과 황제의 사생활


엘라가발루스는 사생활에서도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전례 없던 자유분방한 생활을 추구하며,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성과 여성 모두와 관계를 맺었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여장을 즐겼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보수적인 로마 사회에서 큰 반발을 샀고, 그의 사생활은 정치적 논란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비극적 최후, 그리고 잊혀진 황제


결국 엘라가발루스는 로마 상류층과 군대의 신임을 완전히 잃게 되었고, 222년 그의 근위대는 그를 암살했습니다. 시신은 티베르 강에 버려졌고, 그의 이름과 업적은 로마 역사에서 지워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의 통치는 여전히 로마 제국에서 가장 기이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로 기억됩니다. 그는 로마의 황제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로마의 전통을 거부한 인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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