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침략의 공포
9세기 고대 잉글랜드는 잦은 바이킹 침략으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북유럽에서 온 바이킹들은 잉글랜드 동부 해안에 상륙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불을 지르며 공포를 조성했습니다. 바이킹의 공격은 잉글랜드 왕국을 분열시키며 각지의 왕국들, 특히 웨섹스 왕국을 궁지에 몰아넣었죠.바이킹의 목표는 단순한 약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착지까지 세우며 영토를 확장하려 했습니다. 바이킹이 특히 집중적으로 공격한 지역 중 하나는 이스트 앵글리아와 머시아였고, 이를 바탕으로 '대군세(Great Heathen Army)'라 불리는 강력한 군대를 결성했습니다. 잉글랜드의 여러 왕국들이 무너져갔고, 잉글랜드 전역은 암흑기로 빠져들었습니다.
앨프레드 대왕의 등극
이 위기의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웨섹스의 앨프레드 대왕입니다. 앨프레드는 잉글랜드의 마지막 방어선으로서, 바이킹에 맞서 싸울 강력한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초기 통치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바이킹이 잉글랜드 대부분을 점령하자 앨프레드는 잠시 산속으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이때의 일화 중 하나가 바로 '탄 케이크 전설'입니다. 피난 중에 한 농가에서 머물던 앨프레드는 농부의 아내가 구워놓은 케이크를 태우며 꾸중을 들었지만, 그것이 그의 승리를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전략가 앨프레드, 반격을 준비하다
앨프레드는 후퇴 중에도 자신의 병력을 재정비하고 바이킹의 전략을 철저히 분석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성공은 군사적 대응뿐 아니라, 당시 잉글랜드에 널리 퍼졌던 혼란을 진정시키고 내부 단결을 이룬 점입니다. 그는 웨섹스 왕국을 중심으로 방어 체제를 강화했고, 바이킹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요새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이 요새들은 '버로(Burh)'라 불렸고, 이를 통해 주민들을 보호하며 바이킹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결정적 전투: 애딩턴 전투
878년, 앨프레드는 드디어 바이킹과의 운명을 건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이 전투는 '애딩턴 전투(Battle of Edington)'로, 웨섹스 군과 바이킹 대군이 격돌한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앨프레드는 지형을 유리하게 이용하여 적을 포위하고, 바이킹을 물리쳤습니다. 이 승리로 바이킹과의 평화 조약인 웨드모어 조약이 체결되었고, 앨프레드는 바이킹에게서 일부 영토를 인정받고 그들의 지도자인 구스룸을 세례까지 받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서 기독교를 보호하고 잉글랜드 문화의 정체성을 수호한 결정적 순간으로 평가됩니다.잉글랜드 통일의 꿈
앨프레드 대왕은 단순히 외세를 물리친 영웅에 그치지 않고, 이후 잉글랜드 통일의 초석을 놓은 군주로 기억됩니다. 그는 교육과 법률 제도를 정비하며 '앵글로색슨 연대기'라는 역사서를 편찬하여 후대에 잉글랜드의 역사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또한 군사 개혁을 통해 바이킹의 재침략에 대비했으며, 이는 후에 그의 후손들이 잉글랜드 전역을 통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고대 잉글랜드는 앨프레드의 용기와 지혜 덕분에 살아남았고,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영국 역사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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