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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의 숨은 강자, 포르투갈의 리스본 대지진과 제국의 몰락

포르투갈 제국의 전성기 16세기, 포르투갈은 전 세계를 넘나드는 해상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엔히크 항해왕과 바스코 다 가마와 같은 인물들이 아프리카와 인도양을 가로지르며 신항로를 개척한 덕에,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리스본은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하며,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넘어가는 무역의 요충지로 성장했다. 하지만 포르투갈 제국의 번영은 이내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그 운명을 뒤흔든 사건이 바로 1755년의 리스본 대지진이었다. 리스본 대지진: 전쟁과 신앙을 시험하다 1755년 11월 1일,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엄청난 재앙을 맞았다. 당시 아침 9시 40분경, 강력한 지진이 도시를 강타했다. 리스본 중심부는 한순간에 무너져내렸고, 대성당과 궁전, 수많은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지진은 시작에 불과했다. 건물 잔해 속에서 불길이 솟아올라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고, 지진의 여파로 인해 대서양에서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와 도시를 덮쳤다. 당시 리스본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 중 하나였으며, 이번 재앙은 포르투갈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크게 흔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대다수의 건물과 인프라가 파괴되었다. 특히 리스본 항구는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거의 폐허가 되었다. 향신료 무역과 같은 중요한 경제적 활동들이 차질을 빚게 되며, 제국의 상업적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계몽주의 시대와 신에 대한 의문 리스본 대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당시 유럽 사회의 신앙과 철학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많은 이들이 '왜 신은 이런 재앙을 허락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신앙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 철학자 볼테르의 저작 『캉디드』는 이 사건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며, 계몽주의 사상의 성장에 기여했다. 포르투갈 내에서도 대지진에 대한 해석이 엇갈렸다. 일부는 이를 '신의 벌'로 받아들이며 종교적 회개와 신앙심의 강화를 촉구했으나, 반대로 계몽주의적 사고를 가진 이들은 재난을 자연현

알려지지 않은 북유럽의 마녀 사냥: 차가운 땅에서 피어난 공포

북유럽의 숨겨진 공포: 마녀 사냥의 시작 중세와 근세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은 대부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중앙 유럽에서 활발히 일어난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북유럽 역시 그 공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특히 스웨덴과 핀란드에서는 17세기 중반부터 마녀에 대한 공포 가 급격히 퍼지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마녀사냥은 차가운 기후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일어난 만큼, 독특한 방식과 맥락을 가졌다. 핀란드와 스웨덴: 의심이 현실이 되다 핀란드의 마녀 사냥은 다크스톤 사건 으로 유명하다. 1666년, 핀란드의 한 작은 마을에서 어린아이들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번지자 주민들은 그 원인을 마녀로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들 이 이 사건의 주요 대상으로 지목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교회에서 마법을 배웠다' 는 의심까지 받았다. 스웨덴에서도 마녀사냥 재판 이 자주 열렸는데, 특히 1668년에 시작된 스톡홀름의 대재판 에서는 수십 명의 여성이 고발되어 처형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특이한 고문과 처형 방식 북유럽의 마녀 사냥에서는 고문이 흔히 사용되었지만, 다른 유럽 지역과 달리 차가운 물과 얼음을 이용한 처형 방법이 독특했다. 마녀로 의심받은 사람들은 얼음물에 던져져서 물에 떠오르면 마녀 로 간주되었고, 가라앉으면 무고한 사람 으로 판단되었다. 이 비합리적인 방법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이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종교와 정치의 배후: 왜 마녀사냥이 퍼졌나? 스웨덴과 핀란드에서 마녀사냥이 퍼지게 된 배경에는 루터교와 가톨릭의 갈등 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스웨덴과 핀란드는 루터교를 공식 종교로 채택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종교적 불안 과 정치적 혼란 이 겹치면서, 마녀사냥은 단순한 민간 신앙의 문제가 아닌, 종교적 갈등의 도구 로 이용되었다. 또한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은 마녀사냥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 하고자 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마녀 사냥의 종말과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 광기와 두려움의 시대

마녀사냥의 시작: 두려움의 씨앗 중세 유럽은 암흑기라고 불릴 만큼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병, 기근, 전쟁 등의 재앙을 마주하게 되었고, 이 재앙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알 수 없는 재앙의 근원을 '마녀'라는 존재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마녀는 악마와 계약을 맺고 재앙을 일으킨다고 믿었죠. 이렇게 마녀사냥 은 15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역할과 종교재판 교회는 마녀사냥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교황청은 마녀를 이단자로 간주했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종교재판 이 열렸습니다. 종교재판관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해 마녀임을 자백하게 했으며, 그 결과 많은 이들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유명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라는 책은 마녀를 식별하는 방법과 그 처벌 방식을 규정하며, 마녀사냥을 더욱 격화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광기의 절정: 17세기의 대규모 마녀재판 마녀사냥은 17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습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 스위스 에서 대규모 재판이 일어났습니다. 독일의 경우, 한 지역에서만 수백 명이 마녀로 지목되어 처형당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 사람들은 재판을 통해 마녀를 처단함으로써 자신들의 불행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일부 마녀재판에서는 천둥이나 우박 , 작물 실패 같은 자연 재해가 발생한 후, 사람들이 마녀를 처형하고 나서 재난이 멈췄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마녀사냥의 끝과 그 후유증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계몽주의 가 퍼지며 이성적 사고가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마녀사냥은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인식되었고, 마녀재판도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마녀사냥의 후유증은 심각했습니다.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고, 사회는 오랫동안 불신과 공포 속에 살았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주된 희생자였기에, 이 사건은 이후의 여성 인권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녀사냥이 남긴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