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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고대 누미디아 왕국: 로마와의 전쟁과 전설의 왕 마시니사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서 성장한 누미디아 고대 누미디아 왕국은 현재의 알제리와 튀니지 지역에 위치한 북아프리카의 강력한 왕국이었다. 누미디아는 초기에 여러 부족들이 모여 사는 소규모 왕국이었지만, 그 중심에는 마시니사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이 나라는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고, 이러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대립 속에서 점점 더 강력한 존재로 떠올랐다. 특히,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누미디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누미디아는 초기에는 카르타고의 동맹국으로 활동했지만, 점차 로마와 가까워지면서 자신들만의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당시 누미디아는 주로 기병대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기병대는 특히 속도와 기동성이 뛰어났다. 이러한 군사적 역량은 후에 로마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로스 마시니사는 누미디아의 가장 유명한 왕으로, 로마 역사에서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로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초기에는 카르타고의 동맹군으로 활동했으나, 로마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의 교류를 통해 로마의 편에 서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시니사는 뛰어난 외교술과 군사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하였다. 특히, 그의 기병대는 로마군의 약점을 보완하는 중요한 전력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자마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마시니사는 자마 전투 이후 로마의 지원을 받아 누미디아를 통일하고, 이후 그의 통치는 아프리카 북부의 정치적 균형을 재편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카르타고와의 끊임없는 충돌 속에서 누미디아의 영토를 넓혀 나갔고, 그의 후손들은 이후 로마와의 관계 속에서 아프리카 내에서 강력한 왕국을 유지하게 된다. 카르타고와의 마지막 대립 누미디아와 카르타고의 대립은 마시니사와 카르타고의 경쟁으로 인해 점차 격화되었다. 마시니사는 카르타고의 몰락을 원했고, 이를 위해 로마와 협력했다. 결국

잊혀진 로마의 황제, 엘라가발루스: 혼돈과 기행의 황제 이야기

황제가 된 소년, 엘라가발루스 서기 218년,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는 불과 14세의 소년 엘라가발루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는 시리아 출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로마의 황실과 먼 친척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황제가 된 그는 제국을 경악하게 만드는 수많은 기행을 보여주며 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통치 시기는 짧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죠. 신과 같은 황제, 그리고 신성한 기행 엘라가발루스는 자신이 어린 시절 섬겼던 시리아 태양신 '엘라가발'을 황제의 신으로 로마에 도입하려 했습니다. 그는 황제가 된 이후 로마 전통의 신들 대신 엘라가발을 숭배하게 했고, 그 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기이한 의식을 벌였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황제가 종교적 광신도처럼 보이는 이 행동에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이는 그를 로마 시민들과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정치와 권력, 그리고 혼란의 나날들 엘라가발루스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통치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친척들을 고위직에 앉히고, 로마 귀족들의 전통적인 질서와 규율을 무시했습니다. 특히 황제의 신변을 지켜야 할 근위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는 결국 그의 몰락을 불러왔습니다. 기이한 취향과 황제의 사생활 엘라가발루스는 사생활에서도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전례 없던 자유분방한 생활을 추구하며,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성과 여성 모두와 관계를 맺었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여장을 즐겼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보수적인 로마 사회에서 큰 반발을 샀고, 그의 사생활은 정치적 논란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비극적 최후, 그리고 잊혀진 황제 결국 엘라가발루스는 로마 상류층과 군대의 신임을 완전히 잃게 되었고, 222년 그의 근위대는 그를 암살했습니다. 시신은 티베르 강에 버려졌고, 그의 이름과 업적은 로마 역사에서 지워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의 통치는 여전히 로마 제국에서 가장 기이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로 기억됩니다. 그는 로마의 황제였지만, 그 누구보다

아라비아 반도의 숨겨진 제국, 나바타이 왕국: 바위에 새겨진 전설

나바타이 왕국의 등장: 사막에서 피어난 도시 기원전 4세기,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사막 한가운데서 돌연히 나타난 나바타이 왕국은 그 시작부터 신비로웠습니다. 나바타이인들은 유목민에서 시작해 상업과 교역을 통해 번성한 민족으로, 곧 중동 지역의 주요 교역로를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나바타이인들의 수도 페트라는 바위산을 깎아 만든 도시로, 그 독창적인 건축 양식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합니다. 페트라: 바위산 속에 숨겨진 도시 나바타이 왕국의 중심지인 페트라는 사막 속의 기적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단순한 상업적 중심지를 넘어, 나바타이인들의 건축적 재능과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페트라의 유명한 '알 카즈네(Al-Khazneh)'는 정교하게 새겨진 거대한 무덤으로, 영화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에 등장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도시의 또 다른 특징은 사막 한가운데서도 물을 구할 수 있는 독창적인 수로 시스템이었습니다. 나바타이인들은 빗물을 저장하고 분배하는 방법을 개발해 사막 한가운데서도 도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바위 속에 새겨진 왕국의 신비 페트라의 놀라운 점은 단순한 건축물뿐만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위치와 자연과의 조화입니다. 바위산을 깎아 만든 이 도시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천연 요새 역할도 했으며, 도시의 입구인 '시크(Siq)'는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어 방어에 유리했습니다. 또한 나바타이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을 세우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로마 제국과의 충돌: 나바타이의 몰락 나바타이 왕국은 오랜 시간 동안 로마 제국과 상업적 경쟁을 벌였으며, 한때 로마와 동맹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는 나바타이의 부와 상업로를 탐냈고, 결국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 로마 제국은 나바타이 왕국을 정복합니다. 이로써 나바타이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페트라

고대 카프카스의 숨겨진 전쟁: 알바니아와 사산 제국의 대결

카프카스의 고대 왕국, 알바니아 카프카스 지역은 고대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알바니아는 지금의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 일부에 해당하는 고대 왕국으로, 이 지역은 동쪽으로는 카스피해, 서쪽으로는 험준한 산맥에 의해 보호되었습니다. 알바니아 왕국은 그리스-로마 문명과 페르시아 사이에서 중요한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사산 제국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사산 제국의 팽창과 알바니아의 저항 사산 제국은 페르시아를 기반으로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강력한 제국으로, 알바니아를 자국의 속국으로 삼기 위해 침략을 감행했습니다. 사산 왕 샤푸르 1세는 3세기 초에 알바니아를 공격했으며, 이로 인해 양국 간의 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알바니아는 그들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카프카스 산맥의 지형을 이용해 전략적인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알바니아의 비밀 무기, 전투 코끼리 알바니아는 당시 전투 코끼리를 사용하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코끼리는 카프카스의 험난한 지형에서도 적군을 압도하는 무서운 무기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사산 제국의 보병과 기병 부대는 알바니아의 코끼리 부대에 큰 피해를 입었고, 이는 알바니아가 한동안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산 제국은 끈질기게 공격을 이어갔고, 알바니아의 코끼리들도 결국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페르시아와 로마의 끼어든 전쟁 알바니아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로마 제국도 이 지역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산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에서 알바니아는 외교적 줄타기를 해야 했습니다. 알바니아의 왕들은 때로는 로마와 동맹을 맺고, 때로는 사산 제국과 협상하는 등 복잡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알바니아는 사산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들의 독립은 점점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알바니아의 종말과 사산 제국의 승리 알바니아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4세기 말에 이르러 사산 제국은 알바니아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알바니아의 마지막 왕은 패배 후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비극적 사랑: 로마 제국과 이집트의 운명을 건 이야기

사랑과 정치의 교차로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이야기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닙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두 제국, 로마와 이집트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단지 아름다운 여왕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매우 능숙 하고 영리한 군주였습니다. 그녀는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로마의 힘을 이용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로마의 장군이자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안토니우스와 얽히게 됩니다. 운명을 바꾼 타르수스의 만남 기원전 41년,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르수스로 클레오파트라를 불렀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화려한 배 위에서 금빛 옷을 입고 등장 하며 안토니우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 만남은 곧 정치적 동맹 으로 발전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통해 이집트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안토니우스 또한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려 했지만, 이는 곧 비극적인 결말 로 이어지게 됩니다. 옥타비아누스와의 대립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동맹은 로마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옥타비아누스 는 이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에서 '신성한 결혼식' 을 올렸고, 로마에서는 이 소식을 두고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보다 클레오파트라를 우선시한다고 주장하며, 그를 배신자 로 몰아갔습니다. 악티움 해전: 운명의 순간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에 패배합니다. 이 전투는 결국 로마의 승리로 끝났으며,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패배 이후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결심했고, 클레오파트라도 독사를 이용해 생을 마감 하며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나게 됩니다. 영원히 남은 사랑과 패배의 이야기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죽음은 단순히 두 사람의 개인적인 비극이 아니라, 이집트 제국의 몰락과 로마 제국의 확장을

한니발의 이탈리아 원정: 알프스를 넘은 전설의 장군

로마 제국을 공포에 떨게 한 카르타고의 영웅 로마 제국의 초기 역사에서 가장 위협적인 적은 바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 였다.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한니발은 그의 군대와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는 전무후무한 전략 을 세우며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40마리에 달하는 전투 코끼리와 함께 험난한 산악 지형을 돌파해 로마를 공격한 그의 행군은 전설로 남아 있다. 알프스 횡단: 불가능을 가능으로 한니발의 전략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도전 이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누구도 알프스를 통해 대규모 군대가 진격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이러한 점을 정확히 노렸다. 알프스를 넘는 동안 한니발은 혹독한 날씨와 험준한 지형, 로마 동맹국들의 공격에 시달렸지만 로마군이 예상하지 못한 루트를 선택 하며 방어망을 뚫었다. 칸나에 전투: 전술의 천재성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의 군대는 이탈리아 반도를 휩쓸며 칸나에 전투 에서 로마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칸나에에서 한니발은 쌍방포위 전술 이라는 혁신적인 전략을 사용해 로마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섬멸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약 5만 명 이상이 전사하며 전례 없는 패배를 당했다. 이 전술은 이후 수많은 군사 교범에서 천재적인 전술 로 기록되었다. 로마의 반격과 한니발의 최후 하지만 로마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라는 또 다른 천재적인 장군이 등장해 한니발의 고향인 북아프리카를 공격 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결국 한니발은 고향 카르타고로 돌아가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 에서 패배했고, 카르타고는 로마의 손에 무릎을 꿇었다. 한니발은 이후 추적을 피하며 여러 나라를 떠돌다 자결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이탈리아 원정은 수세기 동안 전쟁사의 불멸의 유산 으로 남았다.

고대 로마의 불멸의 전투기술: 테스투도 대형의 비밀

로마 군단의 핵심 전략, 테스투도 고대 로마 제국은 그들의 군사적 전략과 기술로 세계를 정복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바로 '테스투도(Testudo)' 대형이다. 이 전술은 로마 군단병들이 방패를 모아 거대한 '거북이' 모양을 만들어 적의 화살과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방식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안겨준 전략이었다. 테스투도는 라틴어로 거북이를 뜻하며, 방패가 포개어진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테스투도의 역사적 배경 로마 군대는 대규모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방어 전략을 매우 중시했다. 그 중에서도 적의 화살이나 투창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해 사용된 테스투도 대형은, 초기에는 적의 포위 공격을 견뎌내는 공성전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카이사르 시대의 갈리아 원정이나 그리스 정복 전쟁에서 테스투도가 큰 활약을 했다. 적군이 던지는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방패 하나로 막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모든 병사들이 방패를 모아 하나의 단단한 벽을 만들어 방어할 수 있었다. 테스투도 대형의 구성 테스투도 대형은 철저한 훈련을 통해 형성된 전술이다. 앞줄의 병사들은 큰 직사각형 방패를 앞쪽으로 내밀고, 뒤쪽의 병사들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병사들은 모든 방향에서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방패는 서로 맞물리며 하나의 단단한 껍질을 만들었고, 적의 화살이 아무리 비처럼 쏟아져도 테스투도 안에 있는 병사들은 안전했다. 이 구조는 특히 공성전이나 도시를 점령할 때 유용했다. 실전에서의 테스투도 테스투도는 로마 군단이 지닌 독특한 유연성과 조직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 전술은 단순히 방어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적의 전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격적인 전략으로도 사용되었다. 로마군은 테스투도 대형으로 천천히 진군하며 적의 화살이나 투석기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성벽에 가까워졌을 때 빠르게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이런 전략 덕분에 로마는 강력한 성벽을 지닌 도시들도 손쉽게 함락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의 비밀 결사단: 카타콤베의 숨겨진 이야기

카타콤베: 로마 지하의 미스터리한 공간 로마 제국 시기, 도시의 화려함과 권력의 중심부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지하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카타콤베'라 불리는 지하 묘지들이 그 중심에 있었죠. 카타콤베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예배를 드리고, 비밀 모임을 가지던 장소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단순히 묘지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카타콤베는 비밀 결사단의 본거지이자, 제국의 음지에서 활동하던 자들의 은신처였던 것입니다. 비밀 결사단의 탄생과 활동 기원후 3세기, 로마 제국은 내외부의 위기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틈을 타 각종 비밀 결사단이 생겨났는데, 이들 중 일부는 황제를 비판하고 로마 사회의 부패를 고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질서를 뒤흔들기 위해 카타콤베를 거점으로 삼아 은밀히 활동했죠. 특히, '푸가티(Fugati)'라는 결사단은 당시 로마 시민들 사이에 전설처럼 떠돌던 단체로, 공공연한 저항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카타콤베 속의 숨겨진 상징과 비밀 코드 카타콤베의 벽에는 단순한 무덤을 넘어선 수많은 상징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물고기 모양의 이크티스(Ichthys), 포도나무, 양치기 모습의 인물 등은 기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그 외에도 기이한 기호와 암호가 혼재해 있었죠. 이는 비밀 결사단이 서로 소통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사용한 암호였다고 합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상징들이 단순한 기독교 상징을 넘어, 로마의 신비로운 종교와도 연결된다고 주장합니다. 제국의 박해와 결사단의 최후 로마 황제들은 점차 비밀 결사단의 존재를 눈치채기 시작했고, 카타콤베의 활동을 단속하기 위해 특수한 병력들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지하 통로와 수많은 은신처 덕분에 이들을 완전히 소탕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황제 데키우스의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와 함께 카타콤베의 결사단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지만, 일부는 그 전통을 이어받아 중세 유럽의 비

로마 제국의 위대한 수도건설: 수로와 도로가 만든 제국의 길

로마의 수도 기술: 제국의 심장을 뛰게 한 수로 로마 제국은 그들의 수도 건설 기술로 유명합니다. 특히, 수도교 는 로마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긴 공공 시설 중 하나로, 로마 도시 곳곳에 깨끗한 물을 공급했습니다. 로마의 수로들은 아쿠아 아피아(Aqua Appia) 로 시작해 수백 년 동안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11개의 주요 수로망이 로마에 물을 공급했습니다. 이 수로들은 중력을 이용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도록 설계되었죠. 아쿠아 아피아: 수도 건설의 시작 기원전 312년에 건설된 아쿠아 아피아는 로마 최초의 수로로, 로마 공화정의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가 설계했습니다. 이 수로는 약 16km 길이로 지하에 대부분이 위치하여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수로의 성공은 로마의 다른 도시들로 수로 기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죠. 기술의 집합체, 수도교 로마의 수도교들은 특히 아쿠아 클라우디아(Aqua Claudia) 와 같은 거대한 구조물들로 유명합니다. 이 구조물들은 수로의 물을 도시까지 끌어오면서, 높은 지역을 넘나들 수 있도록 다리처럼 지어진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의 수도교들은 당시의 아치형 구조 기술을 잘 보여주는 예로, 중세와 르네상스 건축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도로망: 제국을 하나로 잇다 로마 제국의 성공에는 도로망 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의 도로망은 제국 내 다양한 지역을 연결하여 경제와 군사적 통합 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도로는 군단 이 빠르게 이동하고, 물자와 상품이 쉽게 교환될 수 있도록 만들어 로마 제국의 경제 번영에 기여했습니다. 비아 아피아: 로마의 길의 여왕 로마의 도로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비아 아피아(Via Appia) 입니다. 기원전 312년에 건설된 이 도로는 로마와 남부 이탈리아의 카푸아를 연결했으며, 이후 확장되어 브린디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도로는 돌을 다져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튼튼

고대 카르타고의 멸망: 지중해를 지배했던 상업 제국의 마지막 날들

카르타고의 기원과 성장 카르타고는 기원전 9세기경 페니키아인들이 오늘날 튀니지의 해안에 세운 도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했고, 특히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카르타고의 상업적 성공은 막대한 부와 함께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게 했고, 이는 로마와의 긴장 관계를 초래했습니다. 카르타고의 상징인 비범한 해상 기술과 그들의 함대 는 지중해 전역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카르타고의 바다'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카르타고와 로마의 충돌: 포에니 전쟁 로마와 카르타고의 첫 번째 충돌은 기원전 264년에 시작된 제1차 포에니 전쟁 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전쟁은 양측이 시칠리아 섬의 지배권을 두고 싸운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뛰어난 해군력으로 로마에 맞섰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로마는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얻으며 지중해에서의 입지를 넓혀갔습니다. 카르타고는 이 패배로 인해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그들의 패권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한니발과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년에 시작된 제2차 포에니 전쟁 에서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며 로마를 위협했습니다. 알프스를 넘는 대담한 행군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되었고,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에 엄청난 타격을 주며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의 수도를 점령하지 못했고, 결국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에게 맞서 자마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이 패배로 카르타고는 로마에 다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그들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카르타고의 멸망: 제3차 포에니 전쟁 로마와 카르타고의 마지막 충돌은 기원전 149년에 시작된 제3차 포에니 전쟁 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로마의 극단적인 조건에 반발한 카르타고의 반격으로 시작되었고, 로마는 이를 구실로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카르타고는 3년 동안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기원전 146년, 로마군에 의해